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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되기의 미학…아, 어머니의 손이 탯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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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되기의 미학…아, 어머니의 손이 탯줄인 것을 
<위크앤팡-미술과 문화>
[김유정의 미술로 보는 세상] 

종이예술가 이은희씨  

제주 자연에서 얻는 만가지 색의 아름다움
줌치 작업은 수행을 통해 종이되기의 과정

'줌치'를 행하는 종이예술가     
 
어머니의 거친 손등과 같은 이은희씨의 추상작품  
 
기(氣)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물은 지나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마음은 숨으나 투영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손의 노동은 시간을 기울인 만큼 못 이루는 것이 없다. 자연의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움직이고 꽃은 기다리지 않아도 들녘에 핀다. 자연의 이치가 하루의 시간이나 일생의 저울로 달지 못하듯 찰나와 영원은 나눌 수 없다. 찰나와 영원이라는 시간도 인간의 느낌이고 우리의 판단이라면 시작과 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움직이는 자리가 시작인 셈이다. 그럼 끝은 어딘가. 바로 멈춰선 그 자리다.

만물은 움직인다. 서로 작용하고 서로 변화한다. 변화는 만물의 속성이며 그 운동은 변화의 생명이다.  

사람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자연 대상을 취사선택한다. 자연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하찮은 것이 없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자기 몫을 한다. 이것이 자연이 세상에 온 인연이고, 그 인연을 우연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형(形)도, 색(色)도, 기운(氣韻)도 그것에서 나온다. 그래서 예술은 자연의 특수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그 질료를 자연에서 얻되 자연 자체가 아닌 예술가 자신이, 형상적 인식이라는 자기 검증 과정을 거친 결과에서 나타난다.

종이예술가 이은희(1955~)는 온화한 달빛을 닮았다. 부드러움의 상징이 달이니 달빛과 같이 은은하다. 한지의 자연색을 달빛이 닮은 까닭에 이은희와, 한지와, 달빛은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달이 온화한 여성성이나 넉넉한 심성, 기원의 대상에 비유되는 것은 분명 고래(古來)에 형성된 집단적 무의식에서 기원한다. 우리는 그것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이 원형은 문화와 예술의 원천이고, 공동체, 지역, 개인에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불교에서는 달이 밝고 원만(圓滿)하지만 한 모습을 고집하지 않는 것에서 불법의 상징으로,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변치 않는 모습과 밝음을 유지하는 것에서 진리의 보편성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캄캄한 하늘에 홀로 빛남으로써 불교적 무지인 무명(無明)을 깨뜨리는 유명(有明)으로 상징화되기도 한다.  

종이예술가 이은희는 세간에서 줌치 공예가, 닥종이 염색 공예가, 한지 줌치 공예가 등으로 불린다. 물론 이 이름들은 편의상 이은희의 정체성 때문에 지어진 이름들이다. 특히 '줌치' 는 종이를 다루는 기술의 한 가지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작업하는 종이 다루는 기술임을 금새 알 수 있다. 또 '줌치'는 각이 진 귀주머니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삼삼기 노래'를 일러 '줌치노래'라고도 하는데 이 노래는 여성들이 잠을 쫓을 때 부르던 노동요의 한가지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도 '줌치'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현재 종이를 다루는 모습에서 볼때 '줌치'는 손의 힘을 주어 무른 종이를 주무르며 어떤 형태를 완성해가는 종이 조형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줌치'의 대상이 한지이고, 한지의 재료가 닥지이며, 줌치의 행위가 공예라는 점에서 이은희를 부르는 각양의 용어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더욱 정확히 말하면, 닥지나 한지는 종이의 재료이고, 줌치는 종이를 다루는 기법을 말하며, 또 종이에 물들이는 것을 염색이라 한다. 이 과정이 종이를 이용한 표현행위라는 점에서 이은희를 종이 예술가라고 하는 편이 보다 편하다.

그리고 그를 전통 공예가로 분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전통공예라는 범주는 이미 과거의 형식을 복원하거나 유지하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해석이 불가능하게 된다. 전통을 너무 작은 범위에 몰아넣는 것이다. 한지가 우리 전통의 한 재료이고, 줌치가 한지의 전통기법이라는 점을 들어 종이예술을 한갓 전승(傳承) 공예로만 보게 되면, 진정한 전통은 이어지지 않는다. 이미 '전통(傳統)'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계승과 창조라는 이중성(dualism)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은 이어만 가서도, 그리고 창조적인 방식만 취해도 안되는 멈춤과 움직임의 운동성이 있는 것이다. 즉 전통은 창조적인 시작의 원인이고, 창조는 올바른 계승을 위한 전통의 결과다. 전통을 낡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고에는 전통에 대한 편협한 해석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은희씨가 표현한 자연의 색들  
 
어머니 손등과 같은 추상, 세상의 빛 색

잘 녹아야만 단단하게 굳힐 수 있고, 잘 펴질수록 미세하게 구부릴 수 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함을 이기고 무색(無色)이 만가지 색을 품는다. 이은희의 작업은 '풀기와 굳히기'의 싸움이고, '무색과 유색'의 조화로운 만남에 있다. 풀면 엷어지고 엷어지면 섬세할 수 있고, 쥐면 강해지고 강하면 마음의 뜻이 나타난다. 강하게 쥘수록 강한 선이 나오고, 부드럽게 쥘수록 우아한 면으로 분할된다. 그가 줌치로 행하는 작업들은 추상적인 선들이다. 자연을 닮은 그 선들은 자신의 마음의 표정들이다. 그 마음은 하나의 줄기가 다른 줄기를 아우르며, 거칠음 속에 내포된 부드러운 기운이 마음의 표정들을 구성한다.

"비바람에 시달린 바위의 살결같이 거칠고도 푸근한 어머니의 손등. 어머니! 나를 잡아끌던 어머니의 손이 탯줄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특히 자신의 거친 추상작업들을 '어머니의 손'과 제주섬 '현무암의 살결'에 중첩되게 비유한 것은 그의 삶의 태도이자 은유적 자세였다. 자신의 작업의 본질을 거칠음으로 명명하면서도 그 거칠음이야 말로 부드러운 것을 탄생시키기 위한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이 본질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이 소홀하기 쉬운 은유.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이제 어머니가 된 자신의 관계를 시간의 탯줄로 묶고 있는 깊은 유기성(有機性)에는 같은 여성성(女性性)이라는 사회·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거친 손은 어머니의 노동의 결과이자 자신의 현재의 거친 손이며, 어머니의 거친 손으로 탄생한 가정의 온화함은, 현재 자신의 작업으로 탄생한 작품으로 투사(projection)하고 있는 것이다.

이은희의 색은 곧 자연색이다. 처음 닥종이 자체의 자연 발색(發色)에서 먹, 그리고 컬러로 옮겨갔다. 사실 컬러는 모든 예술가들의 지향점이다. 천지만물에 색이 없는 것이 없고 빛을 받는 모든 자연과 사물은 만가지 색으로 옷을 입는다. 괴테(J.W.Goethe,1749~1832)의 말대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술 행위를 할 때 언제나 본능적으로 색채를 지향해 왔다". 사방에 널려있는 색들은 창작 욕구 충동과 결합한다. 단일 색이나 무채색에서 화려한 색으로 진행하고, 한가지 색에서부터 여러 가지 색을 추구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다양한 색은 표현의 범위를 넓혀준다.

강열함은 적색, 차가움은 청색, 온화함은 황색의 느낌이다. 오방색의 정색(正色)인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과 이에서 파생되는 간색(間色)인 녹(綠), 홍(紅), 벽(碧), 자(紫), 유(黃黑)가 있고, 다시 이 색들에서 번져가는 잡색(雜色)이 있다. 이 열 가지 정색과 간색들은 채도와 명도에 따라 다양한 잡색이 된다. 서양의 파스텔과 같은 색은 부드러운데 정색과 간색들의 채도와 명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행, 그리고 종이되기

이은희는 작업하는 것을 수행으로 생각한다. 먼저 마음을 추스르고 정성으로 감사의 마음을 가진 다음 작품에 임한다. 이은희의 목표는 '종이와 몸이 하나로 일치하는 순간'을 원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줌치 작업은 마음만 앞서도 안되고 수행만 있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염원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고, 수행은 기교로만 답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기(氣)의 작용이다. 그 기는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감정에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기(氣)의 다스림이자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움직이는 외부적 원인이 있기에 기(氣)는 상황적으로 일어나고 잠들기도 한다. 기(氣)는 보이지 않지만 힘의 근원이다. 몸이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로울 때 원기(元氣)는 세어진다. 마음은 원기에 따라 대상에 쏟는 의지(意志)가 다르게 나타난다. 수행은 노동의 시간적 고통이어서 그것을 감내하는 성실한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은희는 종이와 한 몸 되기(불;devenir, 영;becoming)를 꿈꾼다. 마치 유목민이 어릴 때부터 평생을 말과 함께 생활하듯이 말이다. 유목민은 말의 습성을 어릴 때부터 읽힘으로써 동물되기(devenir-animal)를 꿈꾼다. 물론 동물되기는 동물이 아닌 사람이, 동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동물의 감정, 공포 등 현실적인 상태를 사람이 같이 느낄 때 동물과 사람은 언어, 눈빛, 행동에서 일치를 보이고 마치 사람이 동물처럼 자연스럽다. 사람이 동물과 한 몸이 됨으로써 동물과 수월하게 소통하고 행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은희 종이 작업은 종이되기(devenir-paper)의 과정에 있다. 종이와 한몸이 되지 않으면, 종이는 찢기거나 생각대로 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종이인지 종이가 나인지 모를 상태, 대상(종이)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은 무중력 상태처럼 서로 끌림이 없이 이루어진 융합의 시간이 아닐까.

종이 예술가 이은희, 그는 종이로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며 전통 이라는 역사적 지반(地盤) 위에 다시 오늘의 컬러를 입힌다. 옛 사람이 보지 못했던 자연의 만가지 색을 그는 우리의 자리에 펼친다.  미술평론가 


2010년 03월 04일 (목) 20:46:05 제민일보  webmaster@jemi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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