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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 순간의 멈춤과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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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멈춤과 울림

--이은희작가의 한지 예술--

 

글 임혜경

(숙명여대 불문과 명예교수, 연극평론가극단 프랑코포니 대표)

  

  이번 전시는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 등 해외로 우리나라 한지 줌치의 미를 알려온 이은희작가의 30여년의 긴 작업 여정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대규모 전시회이다

  긴 세월을 쉼 없이 작업해온 이은희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은 작가 자신도 놀랄 만큼 그 수가 엄청나다. 제관복, 우비, 가사와 법의, 남녀 한복, 수의, 잠녀복, 갈옷, 주머니, 안경집, 지갑 등의 중요한 전통 재현 작품을 위시한 사실적인 작품들도 많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롭게 현대적으로 표현한 수많은 작품들은 그야말로 추상 회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전통적이건 현대적이건 작품들은 그냥 어디에 놓거나 걸쳐놓기만 해도 그 존재감 자체로 어떤 신비스런 분위기를 만들며 빈 공간을 장악한다. 이렇게 맥이 끊길 뻔한 전통 한지 공예기법과 현대적인 추상 작업을 치열하게 해오며 오롯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한지 줌치 공예가, 종이 예술가 이은희작가가 오랜만에 자신의 작품 수장고를 아낌없이 열었다.

 

  한국 종이의 미술세계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 한 점 한 점은 모두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오랜 세월 켜켜히 쌓여있는 작품들을 빛나게 할 전시는 또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의 특이점이라면, 10년 전, 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개관전에 참가한 이은희작가전에서 이미 함께 협업한 바 있는 까띠 라뺑(Cathy Rapin, 한국외대 불어과 교수, 극단 프랑코포니 상임연출, 시인)이 이번에도 전시 설치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다. 한국인 예술가와 프랑스인 연출가의 이색적인 콜라보레이션 향연이 될 것이다

  프랑스인 연출가는 30년 줌치 작업을 총결산 하는 이 작가의 깊고 진중한 작업의 궤적을 그 넓은 전시 공간에 무거운 액자로만 걸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작품 자체가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 무게와 깊이가 느껴지는 것을 또 이중어법의 반복적인 언어로 다지고 또 다져 무겁게 강조할 일이 아니라고 파악한다

  그 반대로 작가가 끊임없이 주무르고 멈추고 움직인 그 운동성을 바탕으로, 종이라는 기본 마티에르(재료)의 가벼움을 유희 삼아 바람도 들어가게 해 팔랑거리게도 하고, 빛도 넣어 투명하게 비추게도 하고 해서, 집도 되고, 하늘도 되고, 구름도 되고, 비도 되고, 숲도 되고, 미로도 되는... 

  익숙하지 않은 길에서의 뜻밖의 조우, 다시 말해 다른 언어와의 만남, 그 마찰이 만들어내는 역동성, 환상성, 유머, 아이러니, (poésie)와 철학이 있는 설치 예술을 지향한다

  한지로 이러한 예술 경지에 오른 한 인간의 인생을 그가 평생 주물러 온 한지의 일생과 환치시켜보는 다각적이고도 다채로운 작업이 되지 않을까?

 

  이 작가 작업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는 줌치 기법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작가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두 겹의 한지를 물만으로 붙이는 방법으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밀착시키고 주물러 아주 강하게 만드는 기법이다.

 닥종이로 만든 한지를 몇 시간동안 물 속에 담가 주무르고 치고 두들기다 보면 닥의 섬유질이 아름다워지고 광목처럼 질긴 성질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여러 장으로 한 지를 겹치게 되면 가죽만큼 질겨진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모두 갖춘 우리나라 고유의 한지 공예 기법이다”.

 또한 물에 잠긴 한지를 다루는 손질 방법의 하나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주무르는 행위를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이지만 성실한 시간의 흐름과 간절한 기원과 기()를 담은 내공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줌치 작업 자체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수행 과정으로 인식하는 이은희 작가의 작가 의식을 쫒아 긴 동굴 같은 작품 세계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면, 작가의 손에 의해 종이의 원초적인 질료성을 되찾은 덩어리가 한없이 펼쳐지는 과정이 보인다.

 한지를 뜨고 말려서 염색과 발색 과정을 거쳐 모시처럼 고운, 잠자리 날개보다 얇은, 한지의 마지막 모습, 거미줄처럼 끊어질 듯 말듯한 성긴 결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바람이 들어간다. 흔들린다. 이슬이 맺힌다.

  이렇듯 모든 작품은 울림이 있어야하고, 순간의 멈춤과 울림이 있어야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작품은 더도 덜도 아닌 어느 한 순간의 멈춤에서 만들어진다. 어디서 멈춰야하는지는 작가만이 안다. 다 만들어진 작품에 울림이 없다면 기교 뿐이다. 작가는 한지를 보면 벌써 울림을 느낀다고 한다. 그 울림을 품은 한지를 주물러 해체시켜 자신을 비우고 정화시키며 자기만의 울림으로, 공명이 되도록 옮긴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은희 작가와 시인이기도 한 까띠 라뺑 연출가가 협업하는 이 독특한 만남이 만들어내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예술가의 일생, 여성의 일생, 인간의 일생으로 확대시켜 볼 수 있다.

 그러한 주제를 단계별로 구성한 5개의 방에서 작가의 다양한 작품 세계가 유감없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섬세한 눈을 가진 관객은 첫 번째 방에서 어린 시절, 유년 놀이, 두 번째 방에서 청소년기, 만남, 타인, 사랑, 세 번째 방에서 성인, 결혼, , 네 번째 방에서 고통, 미로, 다섯째 방에서 죽음, 초월, 다시 태어남 같은 테마들을 엿볼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이 각자 자유롭게 느끼면 될 일이다.

 이 전시는 특별한 어느 한 예술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 인간 모두의 삶의 보편성을 획득한 아름다운 예술 세계의 진수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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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 010-6575-2833
탐라가 품은 종이 예술의 거장과 함께
제주시 동문로 89-2,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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